청남 오제봉(吳濟峯) 현판 서예 입니다
작품내용: 敎學不倦[교학불권] 가르치고 배우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작품크기: 136 x 35 cm
고급 화선지에 직접쓰신글 사용하지않은 미사용 작품 입니다
청남선생님에게 직접 받은 작품 입니다
부산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한 현대 서예계의 거목이자 예서체의 달인.
아명은 오덕개(吳德介), 아호는 청남(菁南). 아버지는 오준경(吳俊京)이고, 어머니는 나복련(羅福連)이다.
오제봉(吳濟峯)[1908~1991]은 1908년 8월 26일 경상북도 금릉군 증산면 장전리[현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장전리]에서 2남 6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서당 도영재(道英齋)에서 한학을 익혔다. 1923년 음력 5월 6일에 해인사 승려 임환경(林幻鏡)의 제자로 출가하여 불경과 서예를 익혔고, 동률(東律)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해인사에서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화봉(華峰) 유엽(柳燁), 동봉(東峰) 하동산(河東山), 금봉(錦峰) 최범술(崔凡述)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1927년 사교과(四敎科)와 대교과(大敎科)를 마치고 강원을 졸업할 때 임환경이 법호를 내렸는데, 그것이 이후 그의 이름이 된 제봉(濟峯)이었다. 1930년 2월 9일 오제봉은 진주 비봉산의 의곡사(義谷寺)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그로 인해 의곡사는 서화인의 집합 장소이자 진주에 온 시인과 묵객이 반드시 찾는 곳이 되었다. 1939년 12월 9일 진주 호국사에서 부산 기장군 출신의 박남용과 결혼하였다.
1955년 오제봉은 부산으로 이주하여, 대각사(大覺寺)의 주지 맥문(麥門) 김홍경(金弘經)을 비롯한 지인의 도움으로 서예가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에 오제봉은 부산시 중구 광복동의 미화당 백화점에서 제1회 개인 작품전을 개최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이에 고무된 오제봉은 안과 의사이자 서예가인 운여(雲如) 김광업(金廣業)과 함께 대각사 안에 동명서화원을 열었는데, 이는 부산 최초의 서예 학원이었다.
이후 경남고등학교·경남상업고등학교[현 부경고등학교]·부산여자고등학교·영남상업고등학교·동아고등학교·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동아대학교 등에 출강하여 학생들에게 서예를 가르쳤다. 이를 통해 서예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부산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서예를 보급하였다. 또한 부산 지역의 학자와 문인, 지식인과 고승 등과 폭 넓게 교유하면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에 참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1968년에는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에 3층짜리 살림집을 마련하고 3층에 청남묵연회라는 간판을 내걸었는데, 이는 1990년 제자들에 의해 청남문화재단으로 계승되었다.
한편으로 오제봉은 1949년 9월 20일 제1회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한 이후 해마다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에 출품하고, 1962년 1월 10일과 1968년 4월 30일 부산시 공보관, 1963년 11월 14일 진주, 1964년 4월 24일 서울 중앙 공보관, 1965년 8월 16일 경상남도 충무, 1979년 4월 11일 부산 로타리 화랑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고, 1963년 12월 13일 ‘부산-대구 합동 서화전’과 1974년 9월 2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하는 원로 작가전 및 1975년 12월 해외 9개국 순회전에 참가하는 등 만년에 이르기까지 글씨 쓰기와 서예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오제봉은 1961년 11월 제1회 경남 재건 예술제 초대 작가와 서예부 심사 위원으로 위촉받았으며, 1962년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 1964년 1월 19일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 고문을 역임하였다. 1965년 6월 제1회 대한민국 국민 미술전 운영 위원 및 초대 작가, 9월 20일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추천 작가, 12월 15일 부산시 문화 위원 및 문화재위원, 1974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초대 작가 및 심사 위원으로 위촉받아 활동하였다.
1975년 11월 제1회 부산 미술 전람회 운영 위원 및 심사 위원으로 위촉된 이래 1979년까지 부산 미술 전람회 운영 위원을 지냈고, 1978년부터 1979년까지 경상남도 미술 전람회 심사위원장 및 서예 부문 심사 위원, 1978년 경상북도 미술 전람회 심사 위원, 1979년 제1회 신라 미술 대상전 심사 위원, 1980년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서예 부문 심사위원장, 1984년 대한민국 미술 대전 서예 부문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다. 이외에 영남 서예인 연합전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90년 부산시립박물관에 서물(書物) 등 1,493점을 기증한 후 이듬해인 1991년 11월 27일 오제봉은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인 1993년 8월 25일에 부인 박남용은 부산대학교 발전 기금에 병풍 등 서물 800점을 기탁하였다. 오제봉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며, 제자 가운데 대통령상 수상자, 특선, 입선자를 포함해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를 거친 서예 작가만 5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상품명 | 청남 오제봉(吳濟峯) 교학불권 현판 서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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